건축 디자인 교육과 역사 - 1부
건축 디자인의 기초와 미국 역사
미국에서 서부의 개방과 정착은 동부 연안으로부터 모험적인 건축가들에게 풍부한 기회를 제공해 주었다. 그러나 그들 중에는 어떤 공식적으로 인정된 환경에서 훈련받은 사람이 거의 없었다. 일반적으로 건축가들을 위한 기본적인 훈련은 여러 세기 동안 유럽과 기타 지역에서 널리 퍼졌던 전통적인 형태로써 도제를 고용하는 장인의 감독하에 이루어졌다. 새로 온 건축가들은 가구 제작과 석공과 같은 관련 있는 다양한 분야에서 그 직업으로 전환한 사람들이었다.
1862년의 모릴 법령(Morrill Act)은 '무상 토지 불하' 대학들을 설립하였으며, 이 제도를 위한 시행령을 정하였다. 이 법령하에 설립된 대학들은 '실용적인' 교육을 제공하기 위한 것이었다. 이것은 역사적으로 '교육'과 '훈련' 사이에 차이가 있던 유럽 전통과 현저하게 대조적이었다. 이 실용적인 경향은 매우 내구력이 있음을 증명하였으며, 남부와 서부 지역에 가장 많은 영향을 미쳤다.
미국에서 공식화된 교육기관에 근거한 건축 연구는 1814년에 버지니아대학에서 그런 프로그램을 위한 토마스 제퍼스(Thomas Jefferson)의 안이 여러 해 동안 실현되지 못한 채 있다가 1865년에야 메사추세츠 공과대학(MIT)에서 시작되었다. MIT를 필두로 어배너에 있는 일리노이대학에 의해 20년 뒤에, 그리고 코넬대학에 의해 1871년에 시행되었다. 토론토와 몬트리올에 있는 캐나다의 두 학교는 1876년에 설립되었다. 대체로 5년 기간으로 표준화된 전문 프로그램들은 1922년에 코넬에서 최초로 시작되었으며 1940년경에 표준화되었다. 오늘날 북미에는 각자의 취향, 자체의 독특한 역사적 성격, 교수진, 배경이 다양한 건축 전문 프로그램을 제공하는 100개 이상의 교육기관이 있다. 전 세계적으로 훨씬 더 많은 프로그램이 도처에 있으며, 그것은 세부점에서 상당히 차이가 있지만 목적과 방법 이 매우 유사하다.
유럽 중심의 전통과 건축 디자인
교육기관이 그 자체의 독특한 특성을 보이는 한편 서부에 세워졌던 대부분의 교육기관은 두 개의 유럽 형태로부터 파생된 공통적인 교육 방법을 기초로 하는 것이었다. 하나의 형태는 19세기 프랑스의 에콜 데 보자르(Ecole Des Beaus Arts)였고, 다른 하나는 20세기 초 독일의 바우하우스였다. 보편적으로 채택된 교육 사조도 없었지만, 그 영향력은 널리 퍼져나갔다. 전 세계의 건축 학교들은 오늘날까지 중요한 것에서부터 사소한 것에 이르기까지 이 학교들의 전통적인 자취를 보유하고 있다.
에콜 데 보자르의 건축 프로그램은 1819~1968년까지 존속했던 독특한 파리의 교육기관이다. 그 학교는 원래 두 개의 기존 아카데미인, 1648년에 설립된 왕립 미술 조각 아카데미와 1671년에 설립된 왕립 건축 아카데미의 통합과 변형으로 1793년과 1819년 사이에 존재하게 되었다.
이성의 시대의 산물인 왕립 건축 아카데미의 목적은 '좀 더 정확한 지식과 좀 더 정확한 이론을 공식화하는 것', 간단히 말해서 참되고 완벽한 건축에 있었다. 고전 양식(초기에는 그리스와 로마 양식이었고 나중에는 다른 것 특히 프랑스 양식)에 기초를 둔 원리들이 연구되었다. 적절히 적용되자 그 이론은 발전하여 완벽하게 이루어졌다.
일단 설립된 에콜 데 보자르는 세계적인 건축 연구의 중심지가 되었다. 외국인 학생들이 대부분이었으며 그 학교가 존재하는 동안 500명 이상의 미국인이 그 수업 프로그램을 도입했다. 거기에서 그들은 부분적으로 길드와 성직 계급의 학생 기구의 전통을 모델로 한 에콜 데 보자르에 물리적이고 외적인 하나의 체계를 정립하였다. 학생 계급의 맨 꼭대기에는 당시의 그랑프리 수상자인 가장 우수한 학생이 자리를 잡았으며 상급반 학생들 사이에서 디자인 경연대회가 열렸다. 그 계급의 맨 아래에는 신입생들, 즉 지원자들이 차지하였다.
오늘날의 대학과는 대조적으로 학생들은 스튜디오 장인인 '아틀리에 후원자'와 더불어 우선 장기간에 걸친 공부를 한 다음에, 수학, 도형 기하학, 역사, 드로잉, 그리고 가장 중요한 건축 디자인과 같은 과목들로 이루어지는 시험을 통과해야만 입학이 허용되었다. 아틀리에에서 공부하는 학생들은 스튜디오 장인과 접촉함으로써 이득을 얻을 뿐만 아니라 일반적으로 가장 나이가 많은 학생이 지도하는 동료 자치 공동체를 형성하였다. 좀 더 경험이 있는 학생들은 경험이 없는 학생들을 개인적으로 지도하였다. 다시 말해 초보자들은 상급반 학생들이 하는 일을 도왔다. 그 프로그램이 진행되는 연수는 정해지지 않았으나 유일한 제한은 나이가 30세일 때까지라는 점이다. 결국 학점이 수여되지 않았다. 유일하게 그랑프리 수상자만이 졸업했고, 나머지 학생들은 계속 스튜디오에 남았다.
아틀리에 혹은 스튜디오는 그 학교의 건축 교육의 핵심이 되는 곳이었다. 아틀리에들은 센 강의 좌안(Left Bank, 화가들이 많이 사는 곳)에, 즉 캠퍼스에서 벗어난 곳에 있었다. 그 학교는 역사, 수학, 구성을 포함하여 여러 과목에 대한 강의를 자체적으로 제공하였다. 그러나 학생은 필수로 사설 디자인 학교인 자율 아틀리에에서 디자인을 배웠다. 좀 더 유명하거나 영향력 있는 아틀리에 장인일수록 많은 학생들의 인기를 끌었다. 가장 높이 평가받는 곳은 이전 그랑프리 수상자들의 스튜디오였다.
아틀리에로 들어온 학생들은 첫날부터 건축의 신비와 사실을 탐구하였다. 재료의 연구, 자연광에 대한 재료의 반응, 건축 공간의 배열, 구조의 필요성, 그리고 가장 중요한 고전 건축을 연구하였다.
에콜의 주된 교수법은 월례 디자인 경연, 즉 콩쿠르에 집중되었다. 각 경연의 문제점은 선임 교수의 이론에 의해 씌어졌는데, 주제가 에스키스(esquisse), 스케치 해답과 초벌 바르기(projects rendu), 묘사된 프로젝트 사이에서 번갈아 발생했다. 구성 경연은 수학 및 다양한 드로잉 기법과 유사하였기 때문에 중단되었으며, 학생들에게 고전 모티프를 소개하도록 고안된 요소 분석이 1876년에 도입되었다. 콩쿠르의 지속 기간은 에스키스의 경우 12시간으로부터 구성의 경우 4개월에 이르기까지 차이가 있었다. 여러 가지 콩쿠르에 참가하는 것은 자발적이지만, 승급은 주어진 과제를 포함하여 조건으로 지정된 콩쿠르 횟수의 성공적인 완성에 달려 있었다. 콩쿠르에 대한 학생의 일행을 평가하는 일은 꼼꼼한 전문 심사위원인 에콜의 교수들에 의해 사적으로 정밀하게 수행되었다. 결과적으로 이러한 정밀한 조사는 중간시험이었고, 그랑프리는 최종적인 시험으로 결정되었다.
에콜의 철학과 방법은 금세기 초 내내 미국의 건축 교육의 핵심이 되었다. 이것은 파리에서 공부하고 귀국한 미국인, 특히 보자르의 교수를 거쳐 이루어졌다. 에콜을 졸업한 동문은, 파리에서 학위를 받는 최초의 미국인 로이드 워렌(Lloyd Warren)의 감독하에 뉴욕에 보자르 디자인 기관을 건립하였다. 국내의 모든 학교는 그 교육기관과 제휴하였으며, 그들의 경연 작품들을 평가받기 위해 뉴욕의 콩쿠르로 보냈다. 미국의 그랑프리 수상자들은 깊이 있는 연구와 견문을 넓히기 위해 유럽으로 보내졌다.
유럽의 두 번째 전통인 바우하우스는 바흐, 괴테 및 리스트를 포함한 많은 예술적 전통을 낳은 독일의 바이마르에서 1919년에 시작되었다. 파리의 에콜과 마찬가지로 바우하우스 역시 합병의 산물로서, 18세기에 설립된 대공 미술 아카데미(Grand-Ducal Academy of Art)와 벨기에 신미술 운동(Belgian Art Nouveau Movement)의 지도자 헨리 반 데 벨데(Henry van de Velde)가 이끄는, 바이마르의 미술 공예 학교(Arts and Crafts School)가 합쳐진 것이었다.
'건축을 위한 집'이란 의미를 지닌 바우하우스는 건축가이자 화가 가문의 후손이며, 원래 탁월한 건축가였던 발터 그로피우스(Walter Gropius)에 의해 주도되었다. 바우하우스의 이상과 이념들이 에콜과는 현저하게 달랐지만, 에콜의 조직적인 수업은 중시되었다. 여기에도 역시 장인이 지도하는 스튜디오 혹은 작업장이 교과 과정의 핵심이었다. 여기에도 역시 디자인 문제가 건축적 지혜를 판가름하는 주요 수단이었다. 여기에서도 역시 공동체감이 깊이 자리하였다. 그러나 유사성은 제 1차 세계대전이 끝난 후 독일의 파편 속에서 없어지는데, 그로피우스가 건축의 미래에 관한 다른 이념들을 갖게 되었기 때문이다.
바우하우스의 이상을 적절한 시각으로 평가하기 위해서, 거기에는 1920년대 유럽 세계에 작용한 거부할 수 없는 강력한 힘이 있었다는 점을 기억하지 않으면 안 된다. 적어도 이것은 전쟁과 그 뒤를 이은 재건이 아니었다. 아인슈타인의 상대성 이론은 1905년에 출판되었다. 파리에서 피카소와 브라크는 입체주의(큐비즘) 방법들을 개발하는 작업에 열중하였으며, 유럽 전역의 예술가들은 그들의 스튜디오로 가는 순례 여행을 하고 있었다. 이 순례자 중 어떤 이들은 결국 바우하우스의 교수가 되었는데(특히 네덜란드 데 스틸 운동 및 러시아와 동유럽의 구성주의자들과 연관된 사람들), 그들에게 시작 세계에 관한 새로운 급진적인 이념을 전해 주었다. 유럽의 모더니즘 발전에 엄청난 영향력을 미쳤음이 증명된 프랭크 로이드 라이트의 작품은 미국보다 유럽에서 더 유명하였다. 특히 미국에서의 대량생산은 유럽의 전통적인 생산 수단에 심각한 영향을 미쳤으며, 일반적으로 거기에는 '근대적'이며 거의 제약을 받지 않는 예상, 최소한 새로운 질서의 어떤 방향에 대한 기쁨이 있었다. 바우하우스는 모더니스트 이상의 연구와 실천을 위한 초점이 되고 있으며, 변화하는 상황에서 중심 역할을 한다는 사실을 입증하였다. 그로피우스가 처음 임명한 교수는 스위스의 화가 요하네스 이텐(Johannes Itten)이었다. 이텐은 기본 과정이라고 부르기를 주장한 예비 과정을 조직적으로 계획하고 실행하기 위해 고용되었는데, 재기가 뛰어나고 카리스마적이지만 특이한 성격의 교수였다. '새로운 것의 충격(The Shock of the New)'에서 로버트 휴(Robert Hughes)는 이텐을 '70대에 캘리포니아 연안의 고향에 있을 기인'이라고 기술하였다.